이름: �* 날짜: 2022-05-30 10:34:24 코멘트: 4 코멘트: 서흔남 묘비를 처음 등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구글에 많은 도움도 받았고 글도 올렸지만 유명한 유적지에서 처음 사진과 글을 올리게 되는 영광도 누려봅니다. 아무쪼록 남한산성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서흔남 관련사항을 설명할 것 같으면 남한산성 역사관과 남한산성 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지수당 사이 연못 도로변에 서흔남이란 인물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고 서흔남 묘비 위치를 가리키는 이정표는 역사관 앞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는데 역사관 주차장 동쪽 끝 그러니까 지수당 연못과 역사관 주차장 사이 좁은 공터에 비석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서흔남을 소개한 입간판 내용을 간추리면 병자호란 당시 기록한 인조실록에는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서흔남이 연락책의 임무를 자처하고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외부와 연락병 역할을 수행했고 때로는 청군의 병영을 염탐하거나 적군을 암살하는 등 스파이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그 공을 인정받아 면천은 물론 벼슬을 재수받아 당상관에 올랐다고 소개합니다.서흔남의 묘비 중 하나는 윗부분은 유실되어 찾을 수 없고 중간부는 토막나 아랫 묘비에 간신히 얹혀 있는데 전체 내용을 유추하면 서공흔남지묘, 가의대부동지 중추부사, ㅇㅇ한씨부좌라 판독되고 온전한 묘비에는 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서공지묘 라 적혀 있습니다. 이 묘비를 광주시유형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고 합니다.남한산성을 재방문하기 전에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을 영화화한 한편의 영화를 보고 재방문했는데 서흔남의 묘비와 안내판을 보기 전에는 대장장이역을 맡은 고수는 극적 반전을 위해 작가나 영화 제작자가 허구의 인물을 설정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인물이 실존하는 인물이라는데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흔히 알고있기를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가 취한 태도는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새운 많은 의병장들의 활약상을 고의로 깎아내리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의병장 개개인이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의병장들은 소리소문없이 잠행을 하거나 초야에 묻혀 살아야만 했다고 합니다.그 이유는 단 하나. 무너질대로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니 그 누가 위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헌신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왜에 포로로 잡혀간 수많은 뱩성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거부한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임진왜란의 학습효과라고나 할까 병자호란이 발생한 후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임진왜란의 후속 처리에서 찾는 사학자도 있다고 하니 한나라의 위정자가 어떤 자세로 사후처리를 했느냐에 따라 백성들은 위정자 처분에 따라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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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22-05-30 10:34:24
코멘트: 4
코멘트: 서흔남 묘비를 처음 등록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구글에 많은 도움도 받았고 글도 올렸지만 유명한 유적지에서 처음 사진과 글을 올리게 되는 영광도 누려봅니다. 아무쪼록 남한산성 유적지를 둘러보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서흔남 관련사항을 설명할 것 같으면 남한산성 역사관과 남한산성 도립공원 관리사무소에서 지수당 사이 연못 도로변에 서흔남이란 인물을 소개하는 안내판이 서 있고 서흔남 묘비 위치를 가리키는 이정표는 역사관 앞 도로변에 설치되어 있는데 역사관 주차장 동쪽 끝 그러니까 지수당 연못과 역사관 주차장 사이 좁은 공터에 비석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서흔남을 소개한 입간판 내용을 간추리면 병자호란 당시 기록한 인조실록에는 청군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을 때 서흔남이 연락책의 임무를 자처하고 청군의 포위망을 뚫고 외부와 연락병 역할을 수행했고 때로는 청군의 병영을 염탐하거나 적군을 암살하는 등 스파이역할을 충실히 함으로써 그 공을 인정받아 면천은 물론 벼슬을 재수받아 당상관에 올랐다고 소개합니다.서흔남의 묘비 중 하나는 윗부분은 유실되어 찾을 수 없고 중간부는 토막나 아랫 묘비에 간신히 얹혀 있는데 전체 내용을 유추하면 서공흔남지묘, 가의대부동지 중추부사, ㅇㅇ한씨부좌라 판독되고 온전한 묘비에는 가의대부동지중추부사서공지묘 라 적혀 있습니다. 이 묘비를 광주시유형문화재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고 합니다.남한산성을 재방문하기 전에 김훈 작가의 남한산성을 영화화한 한편의 영화를 보고 재방문했는데 서흔남의 묘비와 안내판을 보기 전에는 대장장이역을 맡은 고수는 극적 반전을 위해 작가나 영화 제작자가 허구의 인물을 설정한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 인물이 실존하는 인물이라는데 상당한 충격을 받았습니다.흔히 알고있기를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가 취한 태도는 임진왜란 당시 전공을 새운 많은 의병장들의 활약상을 고의로 깎아내리거나 과소평가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의병장 개개인이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야만 했다고 합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의병장들은 소리소문없이 잠행을 하거나 초야에 묻혀 살아야만 했다고 합니다.그 이유는 단 하나. 무너질대로 무너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니 그 누가 위난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기꺼이 헌신할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뿐만 아니라 왜에 포로로 잡혀간 수많은 뱩성들이 본국으로 귀환하는 것을 거부한 것도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임진왜란의 학습효과라고나 할까 병자호란이 발생한 후 의병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를 임진왜란의 후속 처리에서 찾는 사학자도 있다고 하니 한나라의 위정자가 어떤 자세로 사후처리를 했느냐에 따라 백성들은 위정자 처분에 따라 적응하며 살아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