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 날짜: 2019-07-28 14:34:28 코멘트: 5 코멘트: 채명신(蔡命新). 그는 육군 보병소위로 6·25를 맞으면서 줄곧 최전방에서 싸웠으며 그가 받은 훈장이 28개나 되어 ‘전신(戰神)’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전공을 세웠다.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월남파병을 추진하자 채명신 장군은 완강히 반대했다. 그래도 박 전 대통령이 파병을 결정하고 그를 주월사령관으로 임명하자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들여 3년 8개월간 월남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그는 잠깐 귀국하게 되면 청와대로 가서 신고를 하기 전 동작동 국군묘지에 달려가서 거수경례를 하며 앞서간 부하들의 명복을 빌었다.이 모습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박대통령 측근들은 ‘채명신이 대권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보이기 시작했다.결국 1969년 4월 주월군사령관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는데 그때도 역시 국립묘지부터 달려갔고 그곳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1972년 유신헌법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등 계속 갈등을 빚었다.이 때문에 채명신은 1972년 5월 대장승진 심사에서 탈락의 고비를 마시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외국대사로 나가 있다가 2013년 11월 25일 88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그런데 그의 군인으로서의 정신은 죽어서 더욱 빛났다.당연히 장군묘역에 묻힐 권리가 있고 그에 따른 혜택을 누릴 수 있는데도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과 생사를 함께 했던 사병묘역에 묻혀 달라고 유언을 한 것이다.정부는 그가 남긴 공적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없다며 장군묘역 안장을 권유했으나 결국 본인의 유언에 따라 월남파병 사병묘역에 안장했다. 우리 군 역사상 장군이 사병묘역에 묻힌 것도 처음이지만 사병묘역에 묻히려면 화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죽어 화장을 한 첫 장군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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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2019-07-28 14:34:28
코멘트: 5
코멘트: 채명신(蔡命新). 그는 육군 보병소위로 6·25를 맞으면서 줄곧 최전방에서 싸웠으며 그가 받은 훈장이 28개나 되어 ‘전신(戰神)’이라고 불릴 만큼 많은 전공을 세웠다.박정희 전 대통령이 1965년 월남파병을 추진하자 채명신 장군은 완강히 반대했다. 그래도 박 전 대통령이 파병을 결정하고 그를 주월사령관으로 임명하자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들여 3년 8개월간 월남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그는 잠깐 귀국하게 되면 청와대로 가서 신고를 하기 전 동작동 국군묘지에 달려가서 거수경례를 하며 앞서간 부하들의 명복을 빌었다.이 모습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자 박대통령 측근들은 ‘채명신이 대권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보이기 시작했다.결국 1969년 4월 주월군사령관에서 해임되어 귀국했는데 그때도 역시 국립묘지부터 달려갔고 그곳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과는 1972년 유신헌법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등 계속 갈등을 빚었다.이 때문에 채명신은 1972년 5월 대장승진 심사에서 탈락의 고비를 마시고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고 말았다. 그리고 한동안 외국대사로 나가 있다가 2013년 11월 25일 88세를 일기로 파란 많은 생을 마감했다.그런데 그의 군인으로서의 정신은 죽어서 더욱 빛났다.당연히 장군묘역에 묻힐 권리가 있고 그에 따른 혜택을 누릴 수 있는데도 이 모든 것을 거부하고 자신과 생사를 함께 했던 사병묘역에 묻혀 달라고 유언을 한 것이다.정부는 그가 남긴 공적을 생각해서라도 그럴 수 없다며 장군묘역 안장을 권유했으나 결국 본인의 유언에 따라 월남파병 사병묘역에 안장했다. 우리 군 역사상 장군이 사병묘역에 묻힌 것도 처음이지만 사병묘역에 묻히려면 화장을 해야 하기 때문에 죽어 화장을 한 첫 장군이 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