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I*** B*** 날짜: 2022-11-21 10:45:15 코멘트: 5 코멘트: 영주 도마상에 나타난 동방 기독교(경교) 전래의 흔적을 찾아서한국기독교 역사는 1601년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성당(남당)을 설립한 후 당시 허례허식의 주자학과 당쟁에 시달리던 지식인들이 새로운 학문도입이라는 동기에서 ‘천주실의’(마테오리치 저)를 가져오면서 신앙적인 싹이 튼 이후 200년 정도가 흘렀다는 것이 통상적인 견해로 알려져 왔다. 이 때 전해진 천주교는 바로 서방국가의 동점(東漸)과정에서 전해진 것 서방기독교였다.그러나 1987년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간 암각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기독교 전래에 대한 파장이 일고 있다. 이미 이 암각상은 지역민들에게는 오래전에 알려져 있었으나 당시 유우식씨(고교 교사)가 암각상의 존재를 언론에 알리면서 기독교 초기 전래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었다고 할 수 있다.그동안 고대 동방기독교의 초기전래에 대한 논란의 단초가 되었던 돌십자가나 성모마리아 소상, 철제 십자가(1965년 경주출토, 7~8세기,통일신라시대 추정), 1988년 경북 경산 자인면 일원리에서 발견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당시 유행하지 않던 증여품이나 소장품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평은면 강동리 암각상은 현재 학계에서는 암암리에 동방기독교의 전파의 증좌로 보고 있기도 하다.기독교가 중국에 언제 처음 전파되었는지는 아직 정설이 없다. 경교(景敎)의 초기 전파의 기록은 비문(635년)을 통해 고증이 하나 그 이전 시기부터 중국과 서역간의 빈번한 교류 상황을 볼 때 일찍부터 기독교가 중국에 파급되었을 것으로 본다.당시 기독교의 중국전도설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전설은 예수의 사도 도마의 중국전도설이다. 1세기 초반 에데싸와 인도 서해안 일대에서 전도하던 사도 도마가 인도로부터 해로를 통해 중국 한발리크(北京)에 이르러 전도하고 교회를 세운 후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는 전설이다. 이것은 “성 도마의 전도로 중국인과 에티오피아인 등 수 명이 개종하였으며, 그의 전도열은 천국을 중국에까지 확대하였다”는 인도 마라발 지방의 시리아 교회 기도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13세기경에 기록된 이 기도서 내용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중국에 대한 전도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635년 당 태종에 의한 기독교(경교)의 공허는 고대동방 기독교의 대중국 공전의 길을 트이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중국 전파는 일대 전기를 맞게 되었다.지금 중국의 서안(西安)에 가면 고대의 유명한 비석들을 모아놓은 ‘비림(碑林)’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에 전시된 수많은 비문 가운데 특히 관람객의 눈길을 끄는 거대한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것이다. 781년에 만들어진 이 비석은 높이가 3m가 넘고 폭이 1.5m, 두께가 30여㎝에 이른다.이 비석이 처음 발견된 것은 1600년대 초반이었고 처음에는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없었던 것도 아니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이것이 당나라 때에 만들어진 진품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그 뒤 여러 학자의 상세한 연구와 고증에 의해 경교란 동방기독교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우교비문의 근간인 이 ‘송병서’문에는 주로 경교의 신앙적 교리와 의례 등이 간략하게 개괄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근 150년 동안(태종~덕종) 당 내 경교 전파에 관한 와치위본주의적(王治爲本主義的)인 기술이 점하고 있다.경교비는 동양 최고(最古)의 기독교비로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 기독교의 실상을 증언하는 귀중하고 신빙성 있는 전거다.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전파상 일단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에 의 고대 동서문명교류의 연구에 값진 증좌(證左)를 제공해 준다.6~7세기에 당나라에 전해진 고대 동방 기독교(경교)의 신라 전파에 관해서는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하여 고대 동방 기독교가 한반도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몇 가지 유물과 관련 자료를 통해 추리해 볼 수 있다.첫째 관련 유물이다.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굴된 돌십자가(石十字架,Stone Cross,24.5×24×9㎝)와 경주에서 발굴된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십자문장식,Cross-based Design,5.5×5.6㎝, 2.4×3.2㎝), 성모 마리아 소상(Statue of Vergin of Mary,7.2×3.8×2.8㎝이다.(그림)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3점의 유물은 모두 7~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돌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형이어서 십자가의 5가지 유형 중 초기 십자가형인 그리스형에 속한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 장식품으로, 그리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유물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널리 유행하던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나, 간혹 유행하지 않았던 증여품이나 소장품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다. 따라서 몇 점의 유물을 특정 시대의 어떤 사회 전반의 증거물로 삼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도마상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관련이 있을 개연성은 짙지만, 아직 연구가 미흡해 무어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도마상의 해명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인 두부(頭部)가 떨어져나감으로써 실체를 밝히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몇몇 주민의 얘기로는 임란 때 왜군이 상의 목을 잘랐는데, 30~40년 전만해도 두부가 상 앞에서 뒹굴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곳 어딘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 두부가 제비원미륵상(안동시 이천동 소재)이라고 하기도 한다. 앞으로 관련학계의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1987년 영주 도마상이 발견되고 세상에 알려진 지가 20년이 흘렀다. 문화교류사와 고고학 종교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여기와 관련된 논문을 내고 있지만 아직까지 미약한 편이다. 더구나 그 연구의 단초가 고대 동방기독교라는 생소한 주제이기에 관련 자료들도 일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된 성과만으로도 우리는 영주 강동리 도마상이 기독교적인 유물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꺼낼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유적은 유교와 불교문화의 지역에서 기독교적 문화의 유적지가 스며있는 지역으로서 명실공히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본향이라 할 만하다.그래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기독교 단체와 연구자들(학자,신학생)이 이 지역을 찾고 있으나 아직까지 영주시 안내 지도에 도마상에 대한 안내표시가 없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이 도마상을 “강동리 마애보살입상”이라는 안내표지판을 내건 것은 지금까지의 학술적인 노력과 논란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영주시는 보다 정확한 자료조사 및 학술조사 등을 통해서 자칫 문화적 가치를 매몰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이름: I*** B***
날짜: 2022-11-21 10:45:15
코멘트: 5
코멘트: 영주 도마상에 나타난 동방 기독교(경교) 전래의 흔적을 찾아서한국기독교 역사는 1601년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성당(남당)을 설립한 후 당시 허례허식의 주자학과 당쟁에 시달리던 지식인들이 새로운 학문도입이라는 동기에서 ‘천주실의’(마테오리치 저)를 가져오면서 신앙적인 싹이 튼 이후 200년 정도가 흘렀다는 것이 통상적인 견해로 알려져 왔다. 이 때 전해진 천주교는 바로 서방국가의 동점(東漸)과정에서 전해진 것 서방기독교였다.그러나 1987년 경북 영주시 평은면 강동리에서 머리가 떨어져 나간 암각상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기독교 전래에 대한 파장이 일고 있다. 이미 이 암각상은 지역민들에게는 오래전에 알려져 있었으나 당시 유우식씨(고교 교사)가 암각상의 존재를 언론에 알리면서 기독교 초기 전래에 대한 논란이 재연되었다고 할 수 있다.그동안 고대 동방기독교의 초기전래에 대한 논란의 단초가 되었던 돌십자가나 성모마리아 소상, 철제 십자가(1965년 경주출토, 7~8세기,통일신라시대 추정), 1988년 경북 경산 자인면 일원리에서 발견된 어린양 안고 있는 것과 기도하는 석상이 당시 유행하지 않던 증여품이나 소장품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신빙성에 의문이 제기되었으나 평은면 강동리 암각상은 현재 학계에서는 암암리에 동방기독교의 전파의 증좌로 보고 있기도 하다.기독교가 중국에 언제 처음 전파되었는지는 아직 정설이 없다. 경교(景敎)의 초기 전파의 기록은 비문(635년)을 통해 고증이 하나 그 이전 시기부터 중국과 서역간의 빈번한 교류 상황을 볼 때 일찍부터 기독교가 중국에 파급되었을 것으로 본다.당시 기독교의 중국전도설에 가장 많이 거론되는 전설은 예수의 사도 도마의 중국전도설이다. 1세기 초반 에데싸와 인도 서해안 일대에서 전도하던 사도 도마가 인도로부터 해로를 통해 중국 한발리크(北京)에 이르러 전도하고 교회를 세운 후 다시 인도로 돌아갔다는 전설이다. 이것은 “성 도마의 전도로 중국인과 에티오피아인 등 수 명이 개종하였으며, 그의 전도열은 천국을 중국에까지 확대하였다”는 인도 마라발 지방의 시리아 교회 기도서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13세기경에 기록된 이 기도서 내용에 대해서는 찬반이 엇갈린다.중국에 대한 전도를 담당하고 있었던 것이다.635년 당 태종에 의한 기독교(경교)의 공허는 고대동방 기독교의 대중국 공전의 길을 트이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중국 전파는 일대 전기를 맞게 되었다.지금 중국의 서안(西安)에 가면 고대의 유명한 비석들을 모아놓은 ‘비림(碑林)’이라는 곳이 있다. 거기에 전시된 수많은 비문 가운데 특히 관람객의 눈길을 끄는 거대한 비석이 하나 있는데, 이름하여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것이다. 781년에 만들어진 이 비석은 높이가 3m가 넘고 폭이 1.5m, 두께가 30여㎝에 이른다.이 비석이 처음 발견된 것은 1600년대 초반이었고 처음에는 진위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없었던 것도 아니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이것이 당나라 때에 만들어진 진품임을 의심하는 사람이 없다.. 그 뒤 여러 학자의 상세한 연구와 고증에 의해 경교란 동방기독교의 한 분파인 네스토리우교비문의 근간인 이 ‘송병서’문에는 주로 경교의 신앙적 교리와 의례 등이 간략하게 개괄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근 150년 동안(태종~덕종) 당 내 경교 전파에 관한 와치위본주의적(王治爲本主義的)인 기술이 점하고 있다.경교비는 동양 최고(最古)의 기독교비로서 경교를 포함한 고대 동방 기독교의 실상을 증언하는 귀중하고 신빙성 있는 전거다. 뿐만 아니라 초기 기독교 전파상 일단을 보여줌으로써 기독교에 의 고대 동서문명교류의 연구에 값진 증좌(證左)를 제공해 준다.6~7세기에 당나라에 전해진 고대 동방 기독교(경교)의 신라 전파에 관해서는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통일신라시대를 전후하여 고대 동방 기독교가 한반도에 전파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그에 대한 근거로는 몇 가지 유물과 관련 자료를 통해 추리해 볼 수 있다.첫째 관련 유물이다.1965년 경주 불국사 경내에서 발굴된 돌십자가(石十字架,Stone Cross,24.5×24×9㎝)와 경주에서 발굴된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십자문장식,Cross-based Design,5.5×5.6㎝, 2.4×3.2㎝), 성모 마리아 소상(Statue of Vergin of Mary,7.2×3.8×2.8㎝이다.(그림)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3점의 유물은 모두 7~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추정된다. 돌십자가는 좌우상하의 길이가 거의 대칭형이어서 십자가의 5가지 유형 중 초기 십자가형인 그리스형에 속한다. 2점의 철제 십자문 장식은 부착용 장식품으로, 그리고 성모 소상은 양각으로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구도로 보아 마리아상으로 추정된다. 일반적으로 유물에는 이미 사회적으로 널리 유행하던 유물이 다수를 차지하나, 간혹 유행하지 않았던 증여품이나 소장품이 포함되어 있기도 한다. 따라서 몇 점의 유물을 특정 시대의 어떤 사회 전반의 증거물로 삼는 데는 신중해야 한다.도마상은 고대 동방기독교의 한반도 전래와 관련이 있을 개연성은 짙지만, 아직 연구가 미흡해 무어라고 단정 짓기는 이르다. 도마상의 해명에서 가장 중요한 단서인 두부(頭部)가 떨어져나감으로써 실체를 밝히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몇몇 주민의 얘기로는 임란 때 왜군이 상의 목을 잘랐는데, 30~40년 전만해도 두부가 상 앞에서 뒹굴고 있었으며, 지금은 그 곳 어딘가 묻혀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 두부가 제비원미륵상(안동시 이천동 소재)이라고 하기도 한다. 앞으로 관련학계의 진지한 연구가 필요한 시점이다.1987년 영주 도마상이 발견되고 세상에 알려진 지가 20년이 흘렀다. 문화교류사와 고고학 종교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이 여기와 관련된 논문을 내고 있지만 아직까지 미약한 편이다. 더구나 그 연구의 단초가 고대 동방기독교라는 생소한 주제이기에 관련 자료들도 일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연구된 성과만으로도 우리는 영주 강동리 도마상이 기독교적인 유물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꺼낼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유적은 유교와 불교문화의 지역에서 기독교적 문화의 유적지가 스며있는 지역으로서 명실공히 우리나라 정신문화의 본향이라 할 만하다.그래서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많은 기독교 단체와 연구자들(학자,신학생)이 이 지역을 찾고 있으나 아직까지 영주시 안내 지도에 도마상에 대한 안내표시가 없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이 도마상을 “강동리 마애보살입상”이라는 안내표지판을 내건 것은 지금까지의 학술적인 노력과 논란에 찬물을 끼얹는 처사라고 생각한다. 영주시는 보다 정확한 자료조사 및 학술조사 등을 통해서 자칫 문화적 가치를 매몰시키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