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진흥왕릉

category: 역사적 장소, 관광 명소
address: 대한민국 경상북도 경주시 서악동
rayting: 4
services: 아동: 어린이 환영,




이름: �** �***
날짜: 2024-03-03 01:20:54
코멘트: 4
코멘트: 경주 진흥왕릉Tomb of King Jinheung, Gyeongju사적 Historic Site이 능은 신라 제24대 진흥왕540~576 재위을 모신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진흥왕은 제23대왕인 법흥왕이 아들 없이 세상을 뜨자 조카로서 왕위에 올라 37년간 재위하였다.족위 당시 나이가 7살에 불과하여 왕태후가 섭정*하였다. 진흥왕은 대가야를병합하고 한강 유역과 함경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넓혔다. 화랑제도를 마련하고국사(폐를 편찬하였으며, 불교를 장려하였다. 진흥왕이 세상을 뜨자 영경사체$의북쪽 봉우리에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이 능은 선도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의 끝지락에 있다. 조선 후기에 인근의서약동 삼층석탑보를 제65효 소재지 일대를 영경사터로 보아 이 무덤을 진흥왕릉으로정하였다. 능의 주번에 자연석으로 만든 들레물의 입부가 드러나 있다.*섭정: 군주가 직접 용치할 수 없율 때에 군주률 대신하여 나라름 다스림This is known to be the tomb of King Jinheung (r. 540-576), the 24th ruler of the Sillakingdom (57 BC-935 CE).King Jinheung ascended to the throne after his uncle King Beopheung (r. 514-540) diedwithout a son. As he was only seven years old at the time, his mother acted as regent untilhe was of age. During his reign, he greatly expanded Sillas territory by incorporating theDaegaya chiefdom and taking Baekje kingdom territory around the Hangang River andpart of todays Hamgyeong-do Province. He established a system to select boys fromgood families of good morals and train them to become elite leaders called floweryouths (hwarang). He also compiled a national history and promoted Buddhism.The tomb mound is surrounded by natural stones at the base.
PhotoPhotoPhoto
Photo

이름: G* C**
날짜: 2022-01-05 00:52:53
코멘트: 5
코멘트: 신라 진흥왕묘를 비롯하여 몇기의 왕릉이 있는 곳이지만, 무열왕릉의 관심에 묻혀 소박하기 그지없다.방문객이 많지 않아 차라리 조용하게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 좋다. 무열왕릉을 굽어 보면서 남산을바라 볼 수 있다는 점 또한 좋다.
Photo

이름: �**
날짜: 2021-06-30 12:54:07
코멘트: 5
코멘트: 응~나는 진흥왕 후손이야^^
더 많은 댓글을 보려면 여기를 클릭하세요

이름: �***
날짜: 2018-12-27 05:44:41
코멘트: 4
코멘트: 선도산 등산길에 들르는 곳

이름: �**
날짜: 2018-11-15 00:10:14
코멘트: 4
코멘트: 구절초 꽃향으로 가득한 서악동 고분군~
PhotoPhotoPhoto
PhotoPhoto

이름: J** J**** (**********
날짜: 2018-07-25 14:48:13
코멘트: 5
코멘트: 무열왕릉 보시고 옆길로 차로 쭉올라가면 나옵니다. 무료구요. 무열왕릉보다 산책등 하기가 더 좋은곳이던데 왜 사진이나 리뷰가 없는지 모르겠더군요.. 국사배울땐 무열왕보다 진흥왕이 더 대단했던거 같던데ㅎㅎ

이름: �**
날짜: 2017-01-01 05:10:58
코멘트: 5
코멘트: 주 메뉴 열기편집주시하기다른 언어로 읽기진흥왕신라 진흥왕新羅 眞興王신라의 제24대 국왕김삼맥종(金三麥宗), 김심맥부(金深麥夫)540년~576년불교526년신라 금성576년 (향년 51세 또는 43세)신라 금성사도왕후입종 갈문왕지소태후법흥왕진지왕건원(建元), 개국(開國), 대창진흥왕(眞興王, 526년~576년, 재위: 540년~576년)은 신라의 제24대 임금이다. 성은 김(金)이고 이름은 삼맥종(三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불교 승려로서의 법명은 법운(法雲)이다. 법흥왕의 동생이며 지증왕의 아들인 입종 갈문왕(立宗 葛文王)구진(仇珍)과 법흥왕의 딸 식도부인(息道夫人, 지소태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법흥왕은 진흥왕에게 큰아버지이자 외조부가 된다. 진흥왕은 국가 발전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하여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고, 불교 교단을 정비하여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였다. 이를 토대로 신라는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고 함경도 지역으로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562년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1] 이는 이후 신라가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 때는 신라의 전성기였으며, 정복 군주로 불렸다. 고구려의 영토였던 원산만까지 진출한 흔적은 마운령비에서 알 수 있다.540년 7월부터 576년 8월까지 재위하는 동안 540년 7월부터 이듬해 541년 3월까지 법흥왕의 왕후인보도태후가 섭정(수렴청정)하였고 541년 3월부터551년 3월까지 어머니 지소태후가 섭정(수렴청정)하였으며 551년 3월부터 559년 3월까지 친정하였고 559년 3월부터 이듬해 563년 3월까지 상대등 구해공이 대리청정하였으며 563년 3월부터 575년12월까지 다시 친정하였고 575년 12월부터 이듬해576년 3월까지 왕후인 사도왕후 박씨가 대리청정(수렴청정)하였으며 576년 3월부터 같은 해 576년4월까지 미실궁주가 잠시 1개월간 대리청정, 이후576년 4월부터 576년 8월 붕어할 때까지 둘째아들김사륜(훗날 진지왕)이 태자 신분으로 대리청정하였다.생애편집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삼국사기에는 534년생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526년생으로 나와있다. 여러가지 역사적 기록을 대립해서 살펴볼때 삼국유사의 기록이 사실로 여겨진다. 15세 때였던 540년 신라 법흥왕의 붕어로 왕이 되었는데, 540년부터 이듬해 541년까지 법흥왕의 왕후인 보도태후가 섭정을 하였고 541년부터 551년까지 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였으며 그 후551년부터 친정하였다. 544년, 흥륜사를 창건하였다. 이듬해 이사부의 건의에 따라 거칠부로 하여금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551년,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고쳤고[2] 팔관회를 두었다. 가야 사람인우륵으로 하여금 신라에 악을 보급하게 하였다.[3]553년, 황룡사를 창건했다.[4] 568년에 연호를 태창(太昌)으로 바꾸었으며[5], 572년에 다시 홍제(鴻濟)로 바꾸었다.[6]576년, 원화(源花) 제도를 만들어남모와 준정의 두 여인으로 하여금 300여명의 무리를 거느리게 했으나, 곧 두 여인이 서로 시기하다 남모가 죽는 일이 발생하자 원화를 폐하고 화랑(花郞)을 제창하여 고구려, 백제 정벌의 원동력을 이루게 하였다. 말년에는 법운(法雲)이라는 법명으로 중이 되었다고 하며, 왕비인 사도왕후 또한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머물렀다고 한다. 576년(진흥왕 37년), 51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그가 죽자 신라의 왕위는 태자 동륜이 572년에 죽었기 때문에 차남인 사륜(진지왕)이 승계하였다.영토 확장편집진흥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전개하면서 삼국 간의 항쟁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548년 정월에 고구려 양원왕이 예(濊)와 모의하여 백제의 한강 북쪽(한북, 漢北)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였다.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은 백제의 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였다. 신라 왕은 장군 주진(朱珍)에게 명령하여 갑옷 입은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떠나게 하였다. 주진이 밤낮으로 길을 가서 독산성 아래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와 한 번 싸워 크게 격파하였다.[7] 고구려의 내정이 불안한 틈을 타서, 신라와 백제는 고구려의 한강 상류 유역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551년) . [8] 신라는 10개의 군을 얻고 백제는 6개의 군을 얻었다. 신라는 함경남도, 함경 북도에 진출하여 순수비을 세웠는데, 고구려는 돌궐과의 전쟁으로 신라의 영토 확장에 대응할 수 없었다. 이때 백제는 신라에게 연합하여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자고 제의하였고, 고구려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등 진흥왕이 새로 개척한 땅을 신라 땅으로 용인해 주는 대신 고구려 수도 평양성으로 진군하지 말것을 제의하였다. 진흥왕은 백제의 제의을 거절하고 고구려의 제의을 받아들였다. 신라는 경기도, 황해도, 한반도 북서부로 영토을 확장하고 백제로 진군하였으나, 백제가 화해를 시도하여 진군을 멈추었다. 553년 7월, 진흥왕은 백제의 한강 유역을 침략하여 여러 성을 빼았아,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아찬 무력(武力)을 군주로 삼았다.[9][10] 이로써 신라는 백제가 점령하였던 한강 하류 지역을 탈취하여 백제를 포위하였다. 이러한 신라의 팽창은 낙동강 유역과 한강 유역의 2대 생산력을 소유하게 되어, 백제를 억누르고 고구려의 남진 세력을 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천만(仁川灣)에서 수·당(隨唐)과 직통하여 이들과 연맹 관계를 맺게 되어 삼국의 정립을 보았다.[1] 같은해, 음력 10월에 백제의 왕녀가 진흥왕에게 시집 왔다.[11] 한편, 이듬해 백제 성왕은 한강을 빼앗긴 것을 분하게 여겨 신라를 침공하였으나, 신라가 이를 크게 격파하였고, 백제 성왕은 신라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554년).[12] 백제는 남하하여 충청남도 부여로 후퇴하였다. 562년, 가을 7월에 백제가 변방의 백성을 침략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막아 1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같은 해, 사다함의 공으로 대가야를 복속하였고 군대를 강화하였다.[13] 또한 새로 개척한 땅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현재까지 4개의 순수비(창녕 · 북한산 · 황초령 · 마운령)가 전해진다. [14] //외교편집564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15]565년,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려, 진흥왕을 사지절(使持節) 동이교위(東夷校尉) 낙랑군공(樂浪郡公) 신라왕(新羅王)으로 삼았다. 진(陳)나라에서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을 보내 예방하고, 불교 경론(經論) 1천7백여 권을 보내주었다.[16] 566년, 567년, 568년, 570년, 571년에 신라는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17][18][19][20][21] 572년, 북제(北齊)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22]가계편집아버지 : 입종 갈문왕어머니 : 지소태후(只召太后): 법흥왕과 보도부인왕비 : 사도왕후 박씨장남 : 동륜태자차남 : 신라 제25대 왕 진지왕삼남 : 김구륜장녀 : 태양공주차녀 : 아양공주삼녀 : 은륜공주사녀 : 월륜공주후궁 : 숙명궁주 태종 이사부사남 : 정숙태자후궁 : 보명궁주 구진과 지소태후후궁 : 미실궁주: 미진부와 묘도부인오남 : 수종전군오녀 : 반야공주육녀 : 난야공주후궁 : 소비 부여씨 성왕후궁 : 월화궁주 가야국의